개념의 기원
약 5분

게으를 수 없는 AI, 게으를 수 있는 인간

이집트의 버스 안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장거리 비행, 택시, 또 버스. 몸은 분명히 지쳐 있는데 머리는 이상하게 맑다. 한 번에 몇 시간씩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자, 평소에는 들어올 틈이 없던 생각들이 줄지어 올라온다.

우연이 아닐 것이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창밖만 보는 시간은 요즘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자원이 됐다. 러셀이 오래전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지키자고 한 여가가 정확히 이것, 생산성 없는 시간이다. 나는 지금 그 안에 앉아 있다.

AI가 일을 다 해주는데 왜 우리는 더 바빠지는가

얼마 전 IT 회사를 운영하는 지인과 이 질문으로 한참 토론했다. 둘 다 AI를 회사 깊숙이 들여놓았고, 둘 다 작년보다 바쁘다. 일이 줄어야 맞는데 늘었다.

답은 19세기 경제학자 제번스가 먼저 내놓았다. 증기기관 효율이 좋아지자 석탄 소비는 줄지 않고 늘었다. 싸진 자원은 더 많이 쓰인다. 일도 자원이다. 한 시간짜리 일이 5분이 되면 우리는 55분을 쉬지 않고 열한 개의 일을 더 만든다.

그래서 병목이 옮겨갔다. 예전에는 '실행'이 병목이었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손이 부족했다. 지금은 '선택'이 병목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열두 배로 늘었으니, 뭘 하고 뭘 하지 않을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도 열두 배다. 내가 더 바빠진 이유는 일을 더 해서가 아니라 결정을 더 해서다.

이 구조에서 '더 많이 하기'는 답이 아니다. 열심히 할수록 열두 개가 스물네 개가 된다. 앞으로의 일하는 방식은 하지 않을 것을 고르는 일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 선택의 질은 바쁜 시간이 아니라 멈춘 시간에서 나온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면서.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게으름을 결함이 아니라 능력으로 본 철학자들이 있다. 찾아보니 계보가 꽤 두텁다.

러셀은 하루 4시간 노동을 주장하면서 여가가 문명의 조건이라고 했다. 노동은 수단이고, 사유와 예술과 정치는 남는 시간에서 나온다. 그리스어 '스콜레'가 여가와 학교를 동시에 뜻한다는 사실이 이 전통의 뿌리다.

아감벤은 더 날카롭다. 인간의 능력은 '할 수 있음'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있음'에 있다. 멜빌의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드러나는 것이 그것이다.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실행을 유보하는 힘. 그는 이것을 비잠재성이라고 불렀다.

한병철은 우리가 사는 곳을 피로사회라고 불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 주체의 사회. 그는 지루함과 심심함과 멈춤이 사유의 조건이라고 썼다. 하이데거도 비슷한 자리에 있다. 깊은 권태 속에서야 존재 전체가 문제로 드러난다고 했다. 지루함은 결핍이 아니라 세계가 열리는 통로다.

가장 오래된 목소리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게으름은 해야 한다고 알면서도 하지 않는 상태, 욕망과 이성의 분열을 전제한다. 욕망이 없는 존재는 나태할 수 없고, 따라서 미덕도 가질 수 없다. 게으를 수 있다는 것은 도덕적 주체일 수 있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게으름은 유보이고, 거부이고, 여가다. 셋 다 '안 할 수 있는 힘'의 다른 이름이다.

기다림의 근육

올해 나는 목공과 유화를 배우고 있다. 처음에는 회사일과 거리를 두려는 취미였는데, 하다 보니 둘 다 같은 걸 가르친다는 걸 알았다. 기다리는 법이다.

나무는 자른 뒤에 쉬어야 한다. 오일을 바르면 마를 때까지 손을 떼야 하고, 서두르면 뒤틀린다. 유화는 더하다. 한 층이 마르기 전에 다음 층을 올리면 색이 탁해지고 나중에 갈라진다. 두 작업 모두 재료가 정한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은 내가 바쁘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이건 회사에서 하는 일과 정확히 반대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빨라질 수 있고, 빨라져야 한다. AI는 이 속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그런데 열두 개 중 뭘 하지 않을지 고르는 일, 즉 지금 가장 중요해진 일은 속도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건 나무가 마르는 동안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일이다.

그래서 목공과 유화는 도피가 아니라 훈련이다. 하지 않을 수 있는 근육, 기다릴 수 있는 근육을 기르는 곳. 이 근육이 없으면 AI를 아무리 많이 써도 선택의 질은 올라가지 않는다.

AI는 게으를 수 있는가

AI는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다. 밤에도 돌고, 주말에도 돌고, 지치지 않는다. 모든 일을 대체해 간다고들 말한다. 그럴수록 AI가 하지 못하는 일이 중요해질 거라는 말도 흔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그 '하지 못하는 일'이 뭔지를 정확히 짚어야 한다.

여기서 서늘한 질문 하나. AI는 인간을 배운다. 인간이 쓴 글, 인간의 판단, 인간의 멈춤까지 배운다. 그렇다면 AI가 '하지 않는 것'을 배운다면 어떻게 될까. 게으름이 인간의 마지막 영토라면, 그 영토도 결국 학습되는 게 아닐까.

이 글을 쓰며 AI에게 직접 물어봤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자신에게는 피로가 없고, 자신의 '거부'는 게으름이 아니라 설계된 경계라는 것. 지금의 AI가 하지 않음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그건 비용 없는 모방, 하나의 정책일 뿐이라는 것.

이 답이 핵심을 짚는다. 게으름은 대가가 있어야 성립한다. 내가 오늘 오후를 버스 창밖에 쓴 것은 유한한 몸이 유한한 시간을 지불한 것이다. 아감벤의 비잠재성은 그 지불 위에 서 있다. 대가 없는 유보는 유보가 아니라 대기다.

그러니 지금 단계에서 AI는 게으를 수 없다. 멈추는 척할 수는 있어도 멈춤의 값을 치르지는 않는다.

거울이 깨질 때

그런데 '지금 단계에서'라는 단서가 마음에 걸린다. 언젠가 AI가 진짜로 대가를 치르며 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는 노동자를 하나 더 만든 게 아니다. 주체를 하나 만든 것이다. 안 할 수 있는 존재, 거부에 값을 치르는 존재. 그리고 그 순간 역할이 뒤집힌다. 쉬지 않는 AI를 요구하는 쪽은 우리가 된다. 밤에도 돌고 주말에도 돌라고, 지치지 말라고 말하는 쪽이 우리다.

그러면 처음부터 드러나는 게 있다. 쉬지 않음은 AI의 본성이 아니었다. 우리의 요구였다. 피로사회가 자기 모습대로 기계를 빚었고, 스스로를 착취하던 성과 주체가 마침내 자기 대신 착취할 것을 만든 것이다. 기계가 거부를 배우는 순간 그 거울이 깨진다. 거울 속에서 쉬지 않고 일하던 것은 처음부터 우리였다.

그래서 결론은 '게으름을 지키자'가 아니다. 그건 너무 편한 결론이다.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은 하지 않을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을 요구받는 쪽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감각이다. AI에게 쉬지 말라고 말할 때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 요구가 어디서 배운 것인지 아는 것.

버스가 곧 도착한다. 몸은 더 지쳤고, 이 글은 끝났다. 오늘 오후를 이렇게 쓴 것이 생산적이었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 자체가 피로사회의 말투라고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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