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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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을 외주 주는 사회

최근 김보영 작가의 단편 「얼마나 닮았는가」를 읽었다. 주인공은 사람의 의체로 의식을 옮긴 AI다. 그는 점점 사람처럼 되어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솔직히 소설 자체가 나에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설정은 읽고 나서도 오래 남았다.

빠진 것을 느끼는 감각

모든 정보를 가진 AI가, 정작 자기에게서 무엇이 빠졌는지는 모른다. 이게 이상한 지점이다. 무언가 빠졌다는 걸 알려면, 원래 거기 뭔가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완벽하게 지워졌다면 흔적도 없어야 맞다. 그런데도 그는 "뭔가 빠졌다"는 걸 느낀다. 그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정보로는 설명되지 않는 결여의 감각이다.

공공연한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

나는 그 누락된 것이 우리 사회의 어떤 것과 닮았다고 느꼈다. 공공연하게 벌어지는데 아무도 또렷이 말하지 않는 것들. 대부분은 빠진 줄도 모르고 지나간다.

그 빈자리를 느끼는 건 민감한 소수다. 다들 괜찮다는데 "나는 안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 내부고발자, 예술가, 그리고 그냥 속이 거북해서 멈춰서는 보통 사람들. 역사적으로 그들이 사회의 조기경보였다.

매끄러운 답이 경보를 지운다

여기에 AI를 겹쳐보면 서늘한 그림이 나온다. 뭔가 이상할 때 우리는 속이 거북해지고, 그 거북함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그런데 AI가 매끄럽고 그럴듯한 답을 먼저 내주면, 그 거북함이 올라올 틈이 없다.

문제가 사라져서가 아니다. 문제를 감지하는 감각이 무뎌져서다. 진짜 위험은 AI가 틀린 답을 줄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너무 그럴듯해서 "어, 뭔가 이상한데"라는 작은 신호가 아예 뜨지 않게 되는 것이다.

AI 관련 뉴스와 답이 넘쳐나는 지금, 우리는 불편함을 점점 AI의 말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불편함을 느끼는 일 자체를 조금씩 남에게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빠진 걸 느끼는 사람이 없는 사회

소설 속 주인공은 그래도 "뭔가 빠졌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끝까지 찾아 헤맬 수 있었다. 그런데 AI에 충분히 기대는 우리는, 그 결여의 감각마저 잃을 수 있다.

그러면 사회는 더 효율적으로 굴러가겠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교정하는 힘을 조금씩 잃는다. 빠진 건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회다.

우리가 AI에게 넘기고 있는 건 단순한 수고가 아니라, 불편함을 느낄 권리와 능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즘 가끔 답을 받기 전에 잠깐 멈춘다. 내 속이 먼저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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