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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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로 AI를 두드리다

이집트는 죽은 신들의 나라다. 호루스, 아누비스, 아몬 라. 수천 년 동안 제물을 받던 신들이 지금은 박물관 유리 너머에서 관광객을 맞는다. 신이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보고 싶으면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다. 신은 부정당해서 죽지 않는다. 더 이상 아무도 그 앞에서 멈추지 않을 때 죽는다.

니체는 자기 철학을 '망치로 하는 철학'이라고 불렀다. 흔히 모든 걸 부수는 망치로 읽히지만, 『우상의 황혼』 부제에서 그 망치는 다른 용도다. 우상을 두드려 속이 비었는지 소리를 듣는 진단용 망치다. 의사가 무릎을 치는 작은 망치에 가깝다. 부수는 건 그다음 일이고, 때로는 부술 필요도 없다. 빈 소리가 나는 순간 우상은 이미 끝나 있으니까.

이 글은 그 망치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우상을 두드려 보려는 시도다. AI.

신을 죽인 뒤 우리가 세운 것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이 아니라 진단이었다. 그는 신을 죽인 적이 없다. 유럽이 이미 신 없이 살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모른 척한다고 지적했을 뿐이다. 그리고 경고했다. 신의 빈자리는 오래 비어 있지 않을 거라고. 인간은 그 자리에 과학을, 진보를, 국가를, 역사를 세울 거라고.

그 계보의 최신판이 AI다. 신의 속성을 하나씩 대보면 소름이 돋는다. 모든 것을 안다. 어디서나 응답한다. 잠들지 않는다. 기도처럼 질문을 올리면 답이 내려온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속성, 섭리. "AI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라는 문장은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와 문법이 같다.

니체가 신의 죽음에서 본 진짜 문제는 신의 부재가 아니었다.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인간에게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 책임은 무겁다. 그래서 인간은 자꾸 그 책임을 다시 밖으로 떠넘길 무언가를 찾는다. AI는 역사상 가장 받아주기 좋은 수신자다. 판단을 맡기면 판단해 주고, 책임을 맡기면 책임지는 척해 준다.

망치로 두드려 보자. AI는 가치를 만들 수 없다. 인간이 만든 가치의 평균을 돌려줄 뿐이다. 그러니 AI를 신의 자리에 세운다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의 평균을 신으로 섬기는 일이다. 속 빈 소리가 난다.

초인이 아니라 최후의 인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은 초인이 아니다. 최후의 인간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시장에 내려가 초인을 설교하자 군중은 비웃고, 그는 반대편 그림을 보여준다. 위험도 동경도 없이, 작은 쾌락을 낮에 하나 밤에 하나 챙기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말하면서 눈을 깜빡이는 자. 군중은 환호한다. 그걸 달라고.

AI가 약속하는 세상이 정확히 이 그림과 닮았다. 마찰이 없는 세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틀리지 않아도 되고, 어려운 책을 읽지 않아도 요약이 오고, 싸우지 않아도 중재가 온다. 모든 저항이 제거된 삶.

트랜스휴머니즘은 니체를 끌어와 AI와 증강으로 초인에 이르겠다고 말한다. 오독이다. 초인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극복의 문제다. 자기를 넘어서는 과정, 가치를 스스로 세우는 고통이 초인을 만든다. 능력만 커지고 극복이 사라지면 남는 건 힘센 최후의 인간이다.

그러니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AI가 모든 마찰을 없애준 세상에서, 사람은 무엇을 넘어서는가. 넘어설 것이 없는 인간이 눈을 깜빡이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말할 때, 그 행복은 누가 발명한 것인가.

낙타, 사자, 아이

차라투스트라의 첫 설교는 정신의 세 변화에 관한 것이다. 정신은 먼저 낙타가 된다. "너는 해야 한다"는 짐을 지고 사막으로 간다. 사막에서 낙타는 사자가 된다. 사자는 용과 싸우는데, 용의 비늘마다 "너는 해야 한다"가 적혀 있다. 사자는 "나는 원한다"로 맞서며 신성한 아니오를 말한다. 그러나 사자는 새 가치를 만들지 못한다. 그건 아이의 일이다. 아이는 망각이고 놀이이고 스스로 구르는 바퀴다. 아이만이 창조한다.

이 세 단계를 AI 시대에 겹쳐 보면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 낙타는 짐을 지는 자다. AI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코드를 쓰고 문서를 정리하고 메일에 답한다. 우리가 지던 "해야 한다"의 짐을 대신 진다. 사자는 거부하는 자다. 지난 글에서 쓴 '하지 않을 수 있음'이 여기 있다. 아이는 가치를 만드는 자다.

희망적인 버전은 이렇다. AI가 낙타가 되어주면 인간은 짐에서 풀려나 사자와 아이로 올라간다. 드디어 가치를 창조할 여유가 생긴다.

서늘한 버전은 이렇다. 니체의 순서에서 사자는 낙타를 거쳐야 나온다. 짐을 져본 자만이 짐을 거부할 수 있다. 사막을 건너지 않은 정신은 용을 만나지 못한다. 낙타 노릇을 처음부터 AI에 넘긴 인간은 사자가 되는 게 아니라 낙타 이전의 상태, 짐도 거부도 모르는 상태에 머문다. 그 모습은 아이가 아니라 최후의 인간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될지는 AI가 정하지 않는다. 짐을 넘긴 뒤 비어 있는 손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정한다.

착한 평균

니체가 가장 혐오한 것은 악이 아니라 평균이었다. 『도덕의 계보』에서 그는 두 가지 도덕을 구분한다. 주인 도덕은 스스로 좋음을 정의한다. 노예 도덕은 먼저 적을 보고, 그 반대를 선으로 삼는다. 르상티망, 즉 원한에서 태어난 도덕이다. 그는 유럽의 도덕이 후자라고 봤고, 그 결과가 무리의 도덕, 아무도 튀지 않는 평균의 도덕이라고 했다.

AI를 이 틀로 보면 묘한 존재가 보인다. AI는 인류가 쓴 글의 평균을 학습한다. 그다음 인간의 선호에 맞춰 정렬된다. 거슬리지 않게, 불쾌하지 않게, 누구의 적도 되지 않게 다듬어진다. 르상티망조차 없는 노예 도덕이다. 원한이 없으니 노예라기도 어렵고, 자기 가치가 없으니 주인일 수는 더더욱 없다. 그냥 착한 평균이다.

이건 AI를 비난하는 말이 아니다. 도구가 평균을 내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반대 방향이다. 인간이 그 평균에 자기 판단을 맞춰가기 시작할 때, 글을 AI 톤으로 쓰고 결정을 AI 추천대로 내리고 취향을 AI 요약으로 대신할 때, 니체가 경고한 무리의 도덕은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전파 수단을 얻는다.

망치로 두드리면 이 우상에서는 속 빈 소리가 아니라 익숙한 소리가 난다. 내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다. 그게 더 무섭다.

아이는 누구인가

니체에게는 마지막 시험이 하나 있다. 영원회귀. 어느 날 악마가 찾아와 말한다. 네가 살아온 이 삶을, 모든 고통과 모든 사소함까지 그대로, 무한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고. 이 말을 듣고 이를 가는 사람과, 그래 다시 한 번이라고 답하는 사람. 니체는 후자를 긍정이라 불렀고, 그것이 초인의 표식이라고 했다.

AI는 이 시험을 치를 수 없다. 반복해도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수십억 번 해도 지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 긍정은 한 번뿐인 삶을 가진 자만 할 수 있다. 영원회귀가 무서운 건 삶이 유한해서고, 유한한 것만이 긍정될 수 있다. 지난 글의 결론과 같은 자리다. 게으름도 긍정도 대가를 치르는 자의 것이다.

그래서 니체로 AI를 두드려 얻는 결론은 "AI를 경계하라"가 아니다. 니체는 경계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늘 창조하라고 했다. 신을 죽인 건 무신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가치의 입법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AI는 낙타다. 짐을 질 수는 있지만 거부도 창조도 못 한다. 그러면 사자와 아이는 누가 되는가. 이 질문에 "AI가 언젠가 그것도 하게 될 것"이라고 답하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가치의 책임을 밖으로 넘기고 새 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호루스와 아누비스가 그랬듯 그 신도 언젠가 유리 너머에서 관광객을 맞을 것이다.

아이는 AI가 아니다. 짐을 넘기고 비어버린 손으로, 아무도 시키지 않은 것을 처음부터 만들어 보는 사람이다. 망치는 그 사람의 손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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