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리는 왜 거기 있는가
순환을 끊는 기술에 관하여
길 한가운데의 울타리
체스터턴이 남긴 우화가 있다. 길 한가운데 울타리가 서 있다. 개혁가가 말한다. "이게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군. 치워버립시다." 그러자 더 지혜로운 개혁가가 답한다.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면, 치우게 둘 수 없습니다. 가서 이유를 알아내십시오. 그런 다음에 치우고 싶다면, 그때는 치우게 해드리지요."
울타리를 세운 사람은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울타리보다 먼저 죽어서, 지금은 울타리만 남아 있다. 그래서 울타리는 무의미해 보인다. 무의미해 보이는 것과 무의미한 것은 다르다. 이 간격을 무시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실험으로 알고 있다. 국가 단위의 실험으로.
산불을 완벽하게 끈 숲
20세기 초 미국 산림청은 산불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발견 다음 날 오전 열 시까지 모든 불을 끈다는 규칙까지 만들었다. 불은 파괴였고, 파괴는 문제였고, 문제는 풀어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풀었다. 반세기 넘게, 미국의 숲에서 불은 거의 사라졌다.
그동안 숲 바닥에는 타지 않은 연료가 쌓였다. 죽은 나무, 마른 덤불, 촘촘해진 어린 나무들. 원래의 숲에서는 작은 불이 주기적으로 지나가며 이것들을 청소했다. 불은 파괴가 아니라 순환의 한 굽이였던 것이다. 로지폴소나무의 솔방울은 송진으로 밀봉되어 있다가 불의 열기로만 열린다. 이 나무에게 불은 재난이 아니라 산파다. 청소부를 없앤 숲은 연료 창고가 되었고, 마침내 불이 붙었을 때는 끌 수 없는 규모로 붙었다. 오늘날의 메가파이어는 산불을 못 끈 실패가 아니라 백 년간 너무 잘 끈 성공의 청구서다.
같은 구조의 이야기는 몸에도 있다. 세 번째 글에서 썼듯 근육은 저항이 사라지면 사라진다. 뼈도 그렇다. 중력이라는 부담을 치워주면, 그러니까 우주에 몇 달 떠 있으면, 뼈는 자기를 지을 이유를 잃고 밀도를 버린다. 부담은 문제처럼 보였지만 사실 뼈의 존재 이유였다. 마찰처럼 보이는 것들 중 일부는, 하중을 받치는 기둥이다.
우리는 순환의 바깥에 있지 않다
여기서 시야를 최대한 넓혀보자.
지구의 생명은 사십억 년쯤 전 물에서 시작됐고, 그 뒤로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모든 세포는 이전 세포에서 왔다. 지금 내 몸의 세포들은 그 최초의 생명에서 단 한 세대도 건너뛰지 않고 이어진 사슬의 끝이다. 그리고 이 사슬이 사십억 년을 버틴 방식이 순환이다. 낡은 개체가 물러나고 새 개체가 태어나는 회전 속에서만 변이가 시험되고, 적응이 갱신되고, 생명은 변하는 환경을 따라잡았다. 진화에는 엔진이 두 개다. 탄생이 변이를 공급하고, 죽음이 자리를 공급한다. 어느 쪽이 멎어도 회전은 선다.
그러니 죽음을 생명의 반대말로 두는 우리의 어법은, 개체의 문법으로는 맞지만 생명 전체의 문법으로는 틀린다. 개체에게 죽음은 끝이다. 사십억 년짜리 과정에게 죽음은 순환의 반쪽이다. 우리는 이 순환을 바깥에서 관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순환의 한 굽이로서 잠시 물을 담았다 흘려보내는 존재다.
이렇게 보면 앞의 걱정이 좀 더 정확한 문장이 된다. 순환을 끊는 기술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자연을 훼손해서가 아니다.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순환의 다른 이름이어서, 어떤 고리를 끊는 일은 언제나 생명의 일부를 끊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고리가 잘라도 되는 군더더기이고 어느 고리가 하중을 받치는 기둥인지, 겉만 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산불이 그것을 가르쳐줬다.
역사상 가장 성능 좋은 절단기
인간은 원래부터 고리를 끊으며 살아온 종이다. 백신은 병원체의 순환을 끊었고, 상하수도는 콜레라의 순환을 끊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자. 잘 끊었다. 천연두의 순환이 그립다는 사람은 없다. 영아 사망이라는 오래된 고리를 우리는 울면서 끊었고, 그것은 인류가 한 일 중 가장 옳은 일에 속한다. 그러니 이 글은 고리를 끊지 말자는 글이 아니다. 체스터턴도 울타리를 치우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낸 다음에 치우라고 했다.
문제는 속도의 비대칭이다. 산불이 순환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생태학은 거의 한 세기가 걸렸다. 끄는 데는 소방대 하나면 됐다. 고리의 기능을 알아내는 일은 언제나 고리를 끊는 일보다 느리다. 지금까지는 끊는 쪽도 충분히 느려서, 이해가 뒤늦게라도 따라붙을 수 있었다.
AI는 이 비대칭을 극단으로 벌려놓는다. AI는 범용 문제 해결기이고, 문제란 우리가 마찰이라 느끼는 모든 것이다. 기다림, 지루함, 어려움, 반복, 노력. 표시만 하면 치워준다. 역사상 가장 성능 좋은 절단기가, 무엇이 기둥인지 판별하는 우리의 낡은 속도 옆에 도착한 것이다. 걱정해야 할 것은 기계의 악의가 아니다. 선의로, 요청받은 대로, 마찰을 모조리 치워주는 성실함이다. 글쓰기의 수고를 치우면 생각의 어떤 근육이 함께 치워지는지, 지루함을 치우면 무엇이 싹틀 자리가 사라지는지, 우리는 아직 목록을 갖고 있지 않다.
가장 큰 울타리
그리고 이 목록의 맨 끝에, 가장 오래된 울타리가 서 있다. 죽음이다.
다섯 번째 글의 커즈와일은 수명 탈출 속도를 말한다. 의학의 발전이 노화를 앞질러, 죽음이라는 고리 자체를 끊는 시점 말이다. 개체인 나는 그 약속에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네 번째 글을 쓴 손으로 이 문장을 쓰자니 멈추게 된다. 그 글에서 나는 도덕의 갱신이 세대교체라는 환기구로 일어난다고 썼다. 물리학자 플랑크는 과학조차 반대자들이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세상을 떠나서 전진한다고 했다. 죽음은 개체에게는 상실이지만, 종에게는 낡은 확신이 퇴장하는 유일하게 보장된 출구다. 그 출구를 봉하면 어떻게 되는가. 얼어붙는 것은 이제 기계의 가중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이것이 죽음을 예찬하자는 말이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죽음을 짐이면서 동시에 축복이라고 불렀다. 짐이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이고, 축복이 아니라고 말해도 거짓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할 일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라, 이 가장 큰 울타리 앞에서만큼은 치우자는 목소리와 같은 크기로 이것이 무엇을 받치고 있는지 묻는 일이다. 지금 그 질문은 치우자는 목소리에 비해 너무 작다.
지우기 전에 한 번 묻는다
늘 그랬듯 이 질문도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매일 AI에게 마찰을 치워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대체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요즘은 습관을 하나 들이고 있다. 무언가를 지우거나 맡기기 전에 한 번 묻는 것이다. 이 마찰은 무엇을 받치고 있었나. 대부분의 답은 "아무것도"이고, 그러면 홀가분하게 치운다. 가끔 답이 다를 때가 있다. 이 지루함이 내 생각의 발화점이었구나. 이 수고가 내 근육이었구나. 그런 것은 남겨둔다.
울타리는 치워도 된다. 체스터턴도 그렇게 말했다. 다만 순서가 있다. 왜 서 있는지를 먼저 안다. 사십억 년을 돌아온 순환 앞에서라면, 그 순서를 지킬 이유는 사십억 개쯤 된다.
체스터턴의 울타리는 1929년 저작 『The Thing』에 나오는 우화다. 미국 산림청의 오전 열 시 규칙(10 a.m. policy)은 1935년에 도입되어 수십 년간 유지됐다.
참고문헌
- Chesterton, G. K. (1929). The Thing. — "체스터턴의 울타리" 우화의 원전.
- Pyne, S. J. (2001). Fire: A Brief History.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 산불 진압의 역사와 그 생태적 청구서를 다룬 화재사(火災史)의 고전.
- Lane, N. (2015). The Vital Question. W. W. Norton. (한국어판: 『바이털 퀘스천』, 까치) — 생명이 물과 에너지의 순환에서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한 현대적 설명.
- Williams, B. (1973). "The Makropulos Case: Reflections on the Tedium of Immortality." Problems of the Self. Cambridge University Press. — 무한한 삶에서 욕망이 고갈된다는 불멸 논쟁의 출발점.
- Jonas, H. (1992). "The Burden and Blessing of Mortality." Hastings Center Report, 22(1), 34–40. doi:10.2307/3562722 — 죽음을 짐이자 축복으로 보는, 이 글의 마지막 절의 토대.
이어 읽기
이 글은 시리즈의 앞선 글들과 맞물려 있다.
- 3편 「기억하지 않는 것이 나를 기억한다」 — 근육이 저항 없이 사라진다는 이 글의 사례가 처음 나온 곳. 마찰이 능력의 조건이라는 논리의 출발점이다.
- 4편 「얼어붙은 상식」 — 도덕의 갱신이 세대교체라는 환기구로 일어난다는 논증. 이 글의 "가장 큰 울타리" 절은 그 논증 위에 서 있다.
- 5편 「진시황의 알약」 — 수명 탈출 속도와 기다림의 자세에 관하여. 이 글이 던진 "순환" 질문의 개인 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