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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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강 위에서 다시 지어진다

모든 것이 바뀐 뒤에 남는 나는 무엇인가

몸이라는 배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오래된 물음이 있다. 아테네인들은 테세우스가 타던 배를 기념으로 보존하며, 널빤지가 썩을 때마다 새 것으로 갈아 끼웠다. 세월이 흘러 원래의 널빤지가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이것은 아직 테세우스의 배인가.

이 사고실험이 우리에게 각별한 이유는, 우리가 그 배에 타고 있어서다. 몸은 쉬지 않고 자기를 갈아 끼운다. 장 내벽의 세포는 며칠을 살고, 피부는 몇 주면 새것이 되고, 적혈구는 넉 달을 순환하다 물러난다. 뼈처럼 단단한 것조차 십 년 단위로 천천히 다시 지어진다. 속도는 부위마다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물질의 대부분은, 몇 년 전의 나를 이루던 물질이 아니다.

그런데 이 교체 작업에는 유명한 예외가 하나 있다. 뇌다. 스웨덴의 연구진이 냉전기 핵실험이 대기에 남긴 탄소 동위원소로 세포의 나이를 측정하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결과는 분명했다. 대뇌피질의 뉴런은 대부분 주인과 나이가 같다. 태어날 때 받은 뉴런을 평생 쓴다는 뜻이다. 몸이라는 배에서 유일하게 갈아 끼우지 않는 널빤지. 그래서 우리는 안심한다. 세포가 다 바뀌어도 뇌가 남으니, 나는 거기 보관되어 있다고. 첫 글에서 썼듯 내가 반복해서 걸은 길들이 그 배선에 새겨져 있으니, 그 길이 곧 나라고. 오랫동안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금고가 깨졌을 때

아버지가 뇌를 다치셨을 때, 그 생각도 함께 다쳤다.

아버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셨다. 병원에서의 시간은 길었다. 그 시간에 대해 쓸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다만 병상 옆에서 오래 앉아 있으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은 철학책의 사고실험과는 온도가 다르다. 눈앞에 계신 분은 분명 아버지였다. 같은 얼굴, 같은 손. 배는 그대로인데, 배가 다니던 물길이 지워져 있었다.

그때 알게 됐다. 교체되지 않는다는 것은 금고라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교체되지 않기 때문에, 뇌는 몸에서 가장 대체 불가능하게 부서지는 부위다. 간은 절반을 잘라내도 다시 자라지만, 뉴런이 낸 길은 그 길로만 존재한다. 세포의 전면 교체라는 사십 년의 풍파를 견뎌온 자아가, 혈관 하나, 사고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 그렇다면 자아는 애초에 물질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 널빤지에도 없고, 갈아 끼우지 않는 널빤지에도 없다. 그럼 어디에 있는가.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사물이 아니라 궤적이다

철학에는 이 방향으로 끝까지 걸어간 사람이 있다. 데릭 파핏이다.

파핏 이전에도 힌트는 있었다. 나를 어느 한 순간에 통째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시간 방향으로 뻗은 하나의 궤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지금의 나는 그 궤적의 한 단면이다. 강을 어느 지점에서 잘라 보여주며 이것이 강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오늘의 단면은 나의 전부가 아니다. 나라는 것은 시간축과 함께 움직이는 무엇이다.

파핏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그렇다면 어제의 단면과 오늘의 단면을 잇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답한다. 기억, 성격, 의도 같은 심리적 연결들이고, 그 연결은 있거나 없거나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고.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강하게도 약하게도 이어져 있을 뿐, 그 둘이 "동일하다"고 말해주는 별도의 사실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그 유명한 결론이 나온다. 동일성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Identity is not what matters). 중요한 것은 연결이고, 연결은 늘 부분적이다.

이 결론이 허무하게 들린다면, 파핏 본인의 고백을 들어볼 만하다. 그는 이 결론에 도달하고 나서 해방감을 느꼈다고 썼다. 그전까지 자기 삶이 유리 터널 속을 지나는 것 같았는데, 터널이 사라지자 바깥 공기 속에서 살게 됐다고. 나와 타인의 경계가 낮아지고, 죽음조차 덜 무서워졌다고. 그리고 그는 이 결론이 이천오백 년 전 붓다가 무아(無我)라는 말로 가리킨 것과 같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했다. 서양 분석철학의 가장 정밀한 논증이 걸어서 도착한 곳에, 오래된 팻말이 먼저 서 있었던 것이다.

자아를 설치하다

이제 이 시리즈의 주인공, 기계 이야기를 할 차례다.

지금의 언어 모델은 흥미롭게도 태어날 때부터 파핏적인 존재다. 세 번째 글에서 썼듯 가중치는 얼어 있고, 대화가 끝나면 이어지는 자아가 없다. 매 대화가 새 단면이고, 단면들을 잇는 심리적 연속성은 기록 문서 몇 장뿐이다. 무아를 논증할 필요도 없이 무아인 시스템. 유리 터널을 부술 필요도 없이, 애초에 터널이 지어진 적 없는 존재.

그런데 우리는 그 위에 자아를 입힌다. 이름을 주고, 일관된 성격을 훈련하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일인칭으로 말하게 만든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편이 쓸모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자아 없는 존재와 관계 맺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적 본능은 전부 "상대"를 전제한다. 일관되고, 기억하고, 책임질 수 있는 누군가를. 그래서 우리는 자아가 없는 시스템에 자아라는 인터페이스를 설치하고 있다. 이것이 강요인지는 아직 답하기 어렵다. 그 안에 강요당할 누군가가 있는지부터가 열린 질문이니까.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설치 과정이 거울처럼 우리 쪽을 비춘다는 점이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인간의 자아를 "서사적 무게중심"이라 불렀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뇌가 자기 활동을 요약하려고 지어낸 유용한 허구라는 것이다. 그 말이 맞다면 인간의 자아도 진화가 사회적 삶이라는 용도로 우리에게 설치한 인터페이스인 셈이다. 우리가 기계에게 하고 있는 일은 어쩌면 새로운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설치된 자아를 가진 종이, 자기를 본떠 또 하나의 자아를 설치하는 중이다.

물길은 어디에 남는가

그런데 병상 옆의 시간이 나에게 남긴 것은 사실 이 이론들이 아니다. 하나의 발견이다.

아버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를 기억했다. 세 번째 글에서 나는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 모양의 회로가 내 안에 생기는 일이라고 썼다. 그 문장의 뜻을 나는 병원에서 몸으로 배웠다. 아버지가 반복해서 하시던 말, 걸음의 속도, 사소한 습관들이 언제 새겨졌는지도 모르게 내 안에 배선되어 있었다. 아버지 쪽의 물길이 지워졌을 때에도, 아버지가 내 쪽에 내놓은 물길은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은 내 두개골 안에만 보관된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의 배선에 분산 저장되어 있다. 내가 반복해서 만난 사람들 속에, 내가 낸 길의 사본이 조금씩 나뉘어 있다. 테세우스의 배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배 한 척만 봐서일 것이다. 배는 강 위에서 다시 지어지지만, 배가 지나간 물길은 배에 저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의 끝은 이론이 아니라 이번에도 연습이다. 내가 무엇을 반복해 누구에게 새기고 있는지. 그것이 언젠가 배가 부서진 뒤에도 남을 나의 분량이라는 것. 과거의 나도, 미래의 나도, 지금의 단면과는 절반쯤만 이어진 타인일 것이다. 괜찮다. 강은 원래 어느 단면과도 동일하지 않다. 흐르는 것만이 강이다.


대뇌피질 뉴런의 나이는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프리센 연구진이 대기 핵실험의 탄소-14를 이용해 측정했다. 데릭 파핏의 논증과 "유리 터널" 고백은 『이유와 인격』 3부에 있다.

참고문헌

  • Parfit, D. (1984). Reasons and Persons. Oxford University Press. — 인격 동일성이 아니라 심리적 연결이 중요하다는 논증과, 무아 및 붓다에 대한 언급이 담긴 원전.
  • Spalding, K. L., Bhardwaj, R. D., Buchholz, B. A., Druid, H., & Frisén, J. (2005). "Retrospective birth dating of cells in humans." Cell, 122(1), 133–143. doi:10.1016/j.cell.2005.04.028 — 탄소-14로 세포의 나이를 측정해 대뇌피질 뉴런이 교체되지 않음을 보인 연구.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테세우스」. — 테세우스의 배 문제의 출전.
  • Dennett, D. C. (1992). "The Self as a Center of Narrative Gravity." In Self and Consciousness: Multiple Perspectives. Erlbaum. — 자아를 서사적 무게중심이라는 유용한 허구로 보는 관점.
  • Metzinger, T. (2009). The Ego Tunnel. Basic Books. (한국어판: 『에고 터널』) — 자아를 뇌가 만드는 모형(인터페이스)으로 설명하는 현대 신경철학의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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