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을 끊은 산에서 연결을 배웠다
접속과 연기(緣起)는 다른 말이다
휴대폰을 반납하다
몇 년 전, 불교 수련원에서 며칠을 보낸 적이 있다. 입소하면서 휴대폰과 전자기기를 전부 반납했다. 산속에서의 완벽한 오프라인. 지도도, 검색도, 알림도 없는 날들이었다. 처음엔 손이 자꾸 빈 주머니로 갔다. 확인할 것이 없는데 확인하려는 동작만 남아서, 그 동작이 몇 번이고 허공을 짚었다.
며칠의 일과는 단순했다. 먹고, 걷고, 앉아 있고, 배웠다. 그리고 그 단순한 날들에 배운 것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르침이 있다.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 내 이름조차 누가 불러주기 위해 존재하고,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이름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이 무수한 연결 덕분에 존재하므로,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것. 불교는 이것을 연기(緣起)라고 부른다. 초기 경전의 정식은 간결하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어떤 것도 홀로 서지 않는다.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관계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연결이 끊긴 상태로 그 산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접속이 없는 곳에서 연결을 배운 것이다. 이 역설이 오래 마음에 걸렸고, 풀어보니 매듭은 단어에 있었다.
연결이라는 말의 두 가지 뜻
우리는 연결이라는 한 단어로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부른다.
하나는 접속이다. 네트워크가 닿아 있다는 것. 신호가 오간다는 것. 와이파이 표시등이 켜져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의존이다. 내 존재가 다른 존재들에 기대어 성립한다는 것. 연기설이 말하는 연결은 이쪽이다.
밥상 앞에서 하는 오래된 관상이 있다. 이 쌀 한 톨이 내 앞에 오기까지를 거슬러 보는 것이다. 농부의 여름이 있고, 그 여름의 비와 볕이 있고, 볍씨를 물려준 지난해의 벼가 있고, 흙을 만든 셀 수 없는 죽음들이 있다. 틱낫한 스님은 종이 한 장 속에서 구름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썼다. 구름 없이 비가 없고, 비 없이 나무가 없고, 나무 없이 종이가 없으므로, 종이와 구름은 서로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의존의 그물은 이렇게 관상해야 겨우 보일 만큼 길고 촘촘하다.
문제는 접속이 이 그물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데 있다. 배달 앱에서 탭 한 번으로 도착한 밥은, 그 밥을 존재하게 한 사슬을 화면 뒤로 접어 넣는다. 농부와 도매상과 주방과 빗길의 라이더가 로딩 표시 하나로 압축된다. 접속은 의존을 없애지 않는다. 의존을 인터페이스 뒤로 숨긴다. 그래서 상시 접속의 삶은 이상한 착시를 낳는다. 어느 때보다 촘촘히 기대어 살면서,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는 기분으로 사는 것이다.
산에서 그물이 보였던 이유는 이제 분명하다. 접속이 끊기자 압축이 풀린 것이다. 밥이 어디서 오는지, 물이 어디서 오는지, 내 이름이 어디서 오는지가 인터페이스 없이 맨눈에 닿았다. 나는 연결이 끊긴 곳에서 연결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접속이 꺼진 곳에서, 접속이 가리고 있던 의존이 드러난 것이다.
의존을 압축하는 기계
이 시리즈의 주인공을 이 그림 안에 세워보면, AI가 무엇을 하는 기계인지에 대한 하나의 정의가 나온다. AI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의존 압축기다.
답 하나가 화면에 떠오를 때, 그 답을 존재하게 한 그물을 생각한다. 그 문장들을 쓴 수억 명의 사람들, 그들을 가르친 사람들, 그 지식이 건너온 언어와 책과 시행착오의 세기들. 세 번째 글에서 쓴 표현으로 하면, 가중치라는 수천억 개의 숫자 속에 그 전부가 녹아 있다. 그리고 그 전부가 답변 하나로 압축되어, 출처도 얼굴도 없이 도착한다. 쌀 한 톨의 사슬을 배달 앱이 접어 넣었듯이, 인류의 앎이라는 사슬을 AI는 응답 하나로 접어 넣는다.
압축 자체는 죄가 아니다. 압축은 문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수도꼭지는 강과 정수장을 압축했고, 콘센트는 발전소를 압축했다. 덕분에 우리는 살 만해졌다. 다만 여섯 번째 글에서 말한 비대칭이 여기서도 작동한다. 압축은 빨라지는데, 압축된 것을 기억하는 능력은 그대로다. 수도꼭지 뒤의 강을 잊은 사회가 강을 함부로 다루듯, 응답 뒤의 그물을 잊은 사회는 그물을 함부로 다루게 될 것이다.
압축을 도로 푸는 연습
그래서 산에서 가져온 숙제는 접속을 끊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시 접속된 삶으로 돌아왔고, 이 글도 접속된 기계로 쓰고 있다. 숙제는 다른 것이다. 하루에 몇 번, 압축을 도로 풀어보는 것.
이 밥은 어디서 왔는가. 이 문장은 누구에게서 왔는가. 이 답변 뒤에 몇 명이 있는가. 관상이라고 부르면 거창하지만, 실은 발신자를 확인하는 일에 가깝다. 도착한 모든 것에는 발신자가 있다. 다만 표시되지 않을 뿐이다.
수련원에서 배운 문장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 그 말은 빈털터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내 것인 줄 알았던 전부가 실은 수신된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름도, 언어도, 오늘의 밥도. 접속의 시대는 그 수신 내역을 감춘다. 그러니 가끔은 수신 내역을 열어봐야 한다. 그물은 늘 거기 있다. 와이파이가 꺼져도, 아니 꺼질수록, 잘 보인다.
연기의 정식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초기 경전 『잡아함경』에 반복해서 나온다. 종이 속의 구름 비유는 틱낫한의 반야심경 강설에서 가져왔다.
참고문헌
- 『잡아함경(雜阿含經)』 —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로 정식화된 연기설의 원전.
- Thich Nhat Hanh (1988). The Heart of Understanding. Parallax Press. (한국어판: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 종이 한 장 속의 구름, 상호존재(interbeing) 개념.
- Turkle, S. (2011). Alone Together. Basic Books. (한국어판: 『외로워지는 사람들』) — 접속이 늘수록 관계가 얇아지는 역설에 대한 고전적 관찰. 다음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어 읽기
- 3편 「기억하지 않는 것이 나를 기억한다」 — 가중치라는 숫자들 속에 무엇이 녹아 있는지에 대한 첫 논의.
- 6편 「그 고리는 왜 거기 있는가」 — 이해의 속도와 절단의 속도가 어긋난다는 비대칭 논증. 이 글의 압축 논의는 그 연장이다.
- 7편 「배는 강 위에서 다시 지어진다」 — 나라는 것이 관계에 분산 저장되어 있다는 발견. 이 글의 개인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