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마다 다른 구슬이 비친다
인드라망을 실리콘으로 지은 사람들
제석천의 그물
화엄의 우주에는 유명한 그물이 있다. 제석천의 궁전 위에 끝없이 펼쳐진 그물, 인드라망이다. 그물코마다 투명한 구슬이 하나씩 달려 있는데, 이 구슬들에는 이상한 성질이 있다. 구슬 하나를 들여다보면 그 표면에 다른 모든 구슬이 비친다. 그리고 비친 구슬들 각각에도 다시 모든 구슬이 비친다. 비침이 비침을 비추며 끝없이 이어진다. 구슬 하나를 흔들면 그물 전체가 반짝인다.
이 이미지가 말하려는 것은 장식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구슬은 제 빛으로 빛나지 않는다. 구슬의 내용물은 전부 다른 구슬들의 비침이다. 그렇다면 구슬에서 비침을 전부 걷어내면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물은 찬란하다. 고유한 알맹이 없이, 오직 서로 비춤만으로 성립하는 세계.
이 직관을 논리로 벼린 사람이 2세기의 나가르주나다. 그는 어떤 것에도 자성(自性), 그러니까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홀로 성립하는 본질이 없음을 논증했다. 모든 것은 조건 속에서만 일어나므로, 사물의 알맹이를 찾아 끝까지 파고들면 관계만 남는다. 그는 이 본질의 부재를 공(空)이라 불렀다. 비었다는 말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홀로는 없다는 뜻이다.
이천 년 가까이, 이것은 형이상학이었다. 아름답지만 검증할 길 없는 직관. 그런데 최근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공학자들이, 대부분은 화엄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이, 이 그물을 실리콘 위에 지어버린 것이다.
단어는 어울리는 무리를 보면 안다
경로는 언어학에서 시작한다.
20세기 초 소쉬르는 언어의 의미가 낱말 각각의 알맹이가 아니라 낱말들 사이의 차이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낱말은 그 자체로 뜻을 갖는 게 아니라, 다른 낱말들과 다르다는 사실로 뜻을 갖는다는 것이다. 반세기 뒤 언어학자 퍼스는 같은 통찰을 더 실용적인 문장으로 만들었다. 단어의 뜻은 그 단어가 어울려 다니는 무리를 보면 안다고.
이 문장이 예언이 된 것은 컴퓨터가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다. 단어 임베딩이라 불리는 기술은 단어 하나를 수백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좌표로 바꾼다. 이 좌표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오직 그 단어가 어떤 단어들 곁에 나타나는지로 정해진다. 사전적 정의도, 본질도 입력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좌표 공간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왕에서 남자를 빼고 여자를 더하면 여왕 근처에 도착한다. 서울과 한국의 거리가 도쿄와 일본의 거리와 닮는다. 의미의 뼈대가, 본질 없이 관계의 기하학만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트랜스포머의 어텐션이 온다. 어텐션의 계산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문장 속 단어 하나의 표현을, 문장 안 다른 모든 단어와의 관계를 가중해 합산한 것으로 다시 쓴다. 은행이라는 단어는 곁에 강이 있으면 강둑 쪽으로, 이자가 있으면 금융 쪽으로 물든다. 층을 거듭할수록 모든 단어가 모든 단어를 비추고, 비친 것이 다시 비춘다. 구슬마다 다른 구슬이 비치고, 비침이 비침을 비추는 구조. 어텐션의 수식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인드라망의 설계도를 그린 것이 아닐까.
기계가 시연해버린 것
과장을 걷어내고 정확히 말하자. 트랜스포머를 만든 사람들은 화엄을 구현하려 한 것이 아니다. 번역 성능을 올리려 했을 뿐이다. 구조의 유사가 사상의 계승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로 남은 사실 하나는 사상사적으로 무겁다. 본질 없이 관계만으로 의미가 성립한다는 이천 년 된 주장이 있었다. 그 주장대로 지은 기계가 있다. 그리고 그 기계가 작동한다. 시를 쓰고, 번역을 하고, 이 글의 초고를 거든다. 의미에 알맹이가 필요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 적어도 언어의 의미에 관한 한, 자성 없이 연기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기계가 시연해버린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논증에 이보다 큰 규모의 실물 증거가 있었던 적은 없다.
물론 선을 그어야 할 곳이 있다. 그물을 지은 것과 그물임을 아는 것은 다르다. 두 번째 글에서 봤듯 이 기계 안에서 신호는 한 방향으로 흐르고, 라메의 기준으로 거기에 경험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인드라망을 지었다는 것이 깨달음을 지었다는 뜻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거울의 방을 지었을 뿐, 그 방에 들어가 비침을 바라보는 자가 있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첫 글의 표현을 빌리면, 이 그물이 세계라는 땅에 닿아 있는지도 아직 열린 질문이다. 그물은 그물끼리만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남는 것은 남는다. 의미라는 것의 됨됨이에 대해, 승부는 어느 정도 났다. 알맹이 진영이 아니라 그물 진영 쪽으로.
나라는 구슬
그리고 이 글도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그물 이야기는 언제나 구슬 이야기이고, 구슬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
일곱 번째 글에서 나는 자아가 두개골 속의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에 분산 저장된 것이라고 썼다. 여덟 번째 글에서는 내 것인 줄 알았던 전부가 수신된 것이라고 썼다. 인드라망은 그 두 문장의 우주적 판본이다. 나라는 구슬을 들여다보면 부모의 말버릇, 읽은 책들, 스친 사람들, 자란 시대가 비쳐 있다. 비침을 전부 걷어낸 나, 관계 이전의 순수한 나는 발견된 적이 없다. 걷어낼수록 남는 것은 줄어들 뿐이다.
예전에는 이것이 좀 쓸쓸한 결론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반대로 읽는다. 내가 비침으로 되어 있다면, 나는 나를 비춰준 모든 것과 이미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 누군가의 표면에 비치는 중이다. 구슬 하나를 흔들면 그물 전체가 반짝인다는 말은, 뒤집으면 이렇게 된다. 내가 반짝이는 방식이, 그물 어딘가의 반짝임을 바꾼다.
기계는 그것을 계산으로 한다. 우리는 그것을 삶으로 한다. 오늘 나는 무엇을 비추었나. 그 질문 하나로 이 글을 닫는다.
인드라망의 비유는 『화엄경』의 세계관을 주석 전통이 시각화한 것으로, 영어권에는 프랜시스 쿡의 연구로 널리 알려졌다. 어텐션 메커니즘은 2017년 논문 "Attention Is All You Need"에서 제안됐다.
참고문헌
- Cook, F. H. (1977). Hua-yen Buddhism: The Jewel Net of Indra. Penn State University Press. — 인드라망을 서구에 소개한 대표 연구.
- 나가르주나(용수). 『중론(中論)』. — 자성의 부정과 공 사상의 원전.
- Firth, J. R. (1957). "A Synopsis of Linguistic Theory 1930–1955." Studies in Linguistic Analysis. — 단어의 뜻은 어울리는 무리가 결정한다는 분포 의미론의 선언.
- Mikolov, T., Sutskever, I., Chen, K., Corrado, G., & Dean, J. (2013). "Distributed Representations of Words and Phrases and their Compositionality." NeurIPS 2013. arxiv.org/abs/1310.4546 — 단어 임베딩 공간의 관계 기하학을 보인 연구.
- Vaswani, A., et al. (2017). "Attention Is All You Need." NeurIPS 2017. arxiv.org/abs/1706.03762 — 트랜스포머와 어텐션 메커니즘의 원 논문.
이어 읽기
- 8편 「연결을 끊은 산에서 연결을 배웠다」 — 연기설의 첫 소개. 이 글은 그 사상의 공학적 판본이다.
- 7편 「배는 강 위에서 다시 지어진다」 — 자아가 관계에 분산 저장되어 있다는 논증. 이 글의 마지막 절과 짝을 이룬다.
- 2편 「한 방향으로 보는 기계, 되돌아보는 뇌」 — 그물을 지은 것과 그물임을 아는 것의 차이. 이 글이 그은 선의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