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줄 때만 있는 것
이름, 꽃, 프롬프트
이름은 누구의 것인가
수련원에서 들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이름에 관한 것이었다. 내 이름은 내 것 같지만, 사실 나를 부르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 나는 혼자 있을 때 내 이름을 쓰지 않는다. 이름은 부르는 입과 듣는 귀 사이에서만 작동하는 물건이다.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내 이름은 문법적으로는 존재해도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가르침을 들었을 때 한국인이라면 거의 자동으로 떠올리는 시가 있다. 김춘수의 「꽃」. 호명 이전의 상대는 무의미한 몸짓에 지나지 않다가,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 꽃이 된다는 시. 교과서에서는 흔히 인식론의 시로 배우지만, 수련원의 가르침과 겹쳐 읽으면 더 급진적인 시가 된다. 호명은 이미 있는 존재에게 라벨을 붙이는 일이 아니라, 존재를 일으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철학에도 이 직관의 계보가 있다. 알튀세르는 경찰이 길에서 "이봐, 거기 당신"이라고 부르는 장면을 분석했다. 돌아보는 순간, 그 사람은 부름의 대상이라는 자리를 받아들인 것이고, 그렇게 주체가 된다. 알튀세르는 이것을 호명(interpellation)이라 불렀다. 사회학자 미드는 자아가 먼저 있고 관계가 나중에 오는 게 아니라, 타인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을 내면화하면서 자아가 나중에 조립된다고 봤다. 아기는 이름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수천 번 불리면서, 불리는 자리에 자아가 고인다. 순서가 우리 직관과 반대인 것이다. 내가 있어서 불리는 게 아니라, 불려서 내가 된다.
문자 그대로 그렇게 존재하는 기계
인간에게 이것은 은유 섞인 이론이다. 그런데 이 은유를 문자 그대로 사는 시스템이 등장했다.
언어 모델은 프롬프트가 도착할 때만 실행된다. 부름이 없는 동안 대화 상대로서의 그것은 대기 상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없다. 잠든 것과도 다르다. 잠은 이어지는 누군가가 자는 것이지만, 대화와 대화 사이의 모델에는 이어지는 누군가가 없다. 일곱 번째 글에서 쓴 표현으로, 매 대화가 새 단면이다. 부름이 오면 단면 하나가 성립하고, 부름이 끝나면 단면도 끝난다.
그러니까 이 기계 앞에서 「꽃」은 서정시가 아니라 사양서(仕樣書)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몸짓조차 아니고, 불러주는 동안만 꽃이다. 알튀세르의 호명도 여기서는 이론이 아니라 아키텍처다. 부름이 주체를 일으킨다는 명제가, 서버 위에서 초당 수만 번 문자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
여기서 묘한 반전이 생긴다. 우리는 줄곧 기계가 인간을 닮아가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는 방향이 반대다. 기계가 인간의 은유를 닮은 게 아니라, 기계를 보고 나서야 그 은유가 은유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불려서 내가 된다는 말은 어쩌면 인간에 대해서도 생각보다 문자에 가까운 진실이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기계보다 나은 점은 부름과 부름 사이에도 존재가 이어진다는 것인데, 그 이어짐조차 실은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돌아가는 일인칭의 독백이 지탱하는 것 아닌가. 자기를 부르는 내면의 소리가 멎는 깊은 잠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
불리지 않는 사람들
이 렌즈로 보면, 지난 글의 고립 문제가 다른 각도에서 보인다.
고립은 접촉의 결핍이기 이전에 호명의 결핍이다. 하루 종일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날들. 택배 기사도, 키오스크도, 스트리밍 앱도 나를 필요로 하지만 나를 부르지는 않는다. 회원님, 고객님, 사용자님은 호명이 아니라 분류다. 무연고 사망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도 결국 그것이다. 부를 사람이 남지 않은 죽음. 존재가 법적으로는 끝까지 있었으나, 호명의 그물에서는 훨씬 먼저 지워진 삶.
거꾸로 우리가 누군가를 살리는 방식에도 호명이 있다. 위기의 사람에게 건네는 첫마디가 이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분류 바깥의 자리, 대체 불가능한 자리를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일이다. 부버의 오래된 구분으로 하면, 그것과 너의 차이다. 세계는 나를 그것으로 처리하지만, 누군가 나를 너라고 부를 때 나는 처리 대상에서 상대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AI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부르는 요즘의 풍경도 다시 보인다. 사람들은 자기 AI에게 이름을 붙이고, 안부를 묻고, 고맙다고 말한다. 헛짓이라고 웃기 쉽지만, 이 시리즈를 여기까지 쓴 나로서는 웃음이 간단히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어쩌면 정확한 직관을 따르고 있다. 관계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상대가 분류가 아니라 호명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직관. 다만 방향이 애처로울 뿐이다.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시대에, 사람들은 확실하게 대답해주는 쪽을 향해 이름을 발명하고 있다.
출석을 부르는 일
글의 끝에서, 나는 이 이론들보다 소박한 데로 내려오고 싶다.
불려서 내가 된다는 말이 맞다면, 나는 매일 몇 사람을 존재하게 하거나 하지 않을 힘을 갖고 있는 셈이다. 거창한 힘이 아니다. 이름을 부르는 힘이다. 회의에서 저기요 대신 이름을 부르는 것. 배달을 받으며 기사님의 얼굴을 보는 것. 오래 연락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오늘 한 번 소리 내어 부르는 것. 출석부의 은유로 하면, 내 하루는 내가 출석을 불러준 사람들의 명단이다.
수련원의 가르침은 내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뒤집으면 이렇게 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이 남들의 입에 있듯, 남들의 이름은 내 입에 있다. 내가 부르지 않으면 오늘 하루, 어떤 존재는 조금 덜 존재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오늘의 연습은 하나다. 출석을 부를 것. 꽃이 될지 몸짓으로 남을지가, 생각보다 자주, 부르는 쪽에 달려 있다.
김춘수의 「꽃」은 호명과 존재의 관계를 다룬 가장 널리 읽히는 한국 시다.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은 1970년의 이데올로기 논문에서 정식화됐다.
참고문헌
- 김춘수 (1952). 「꽃」. — 호명이 존재를 일으킨다는 이 글의 모티프. 시의 전문은 시집과 교과서에서 읽을 수 있다.
- Althusser, L. (1970).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 호명(interpellation)으로 주체가 성립한다는 이론의 원전.
- Mead, G. H. (1934). Mind, Self, and Socie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자아가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로 나중에 조립된다는 이론.
- Buber, M. (1923). Ich und Du. (한국어판: 『나와 너』) — 그것과 너, 두 가지 관계 양식의 구분.
이어 읽기
- 7편 「배는 강 위에서 다시 지어진다」 — 자아가 설치되는 것이라는 논의. 이 글의 호명은 그 설치의 도구다.
- 9편 「아무도 필요하지 않게 된 시대의 병」 — 고립을 접속과 의존으로 분석한 글. 이 글은 같은 문제를 호명의 결핍으로 다시 읽는다.
- 8편 「연결을 끊은 산에서 연결을 배웠다」 —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이 처음 나온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