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기원
12편약 4분

빌린 문장으로 쓰는 글

무소유의 눈으로 본 학습 데이터

법정에 선 그물

지금 세계 곳곳의 법정에서 같은 질문이 심리되고 있다. 작가들과 신문사들이 AI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우리의 문장으로 너희의 기계를 만들었으니 값을 치르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가 오픈AI를 상대로 낸 소송이 대표적이고, 비슷한 사건들이 줄지어 있다.

이 소송들을 가볍게 여길 생각은 없다. 글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의 문장이 동의 없이 흡수되어, 그들의 일을 대체할지도 모르는 기계의 재료가 됐다. 보상과 동의라는 쟁점은 정당하고, 어느 쪽으로 정리되든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계약서가 될 것이다. 이 글은 그 법적 다툼의 답을 아는 척하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이 풍경 앞에서, 수련원에서 배운 문장 하나가 자꾸 겹쳐 떠오른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연결 덕분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는 문장. 소유를 둘러싼 가장 시끄러운 다툼의 한가운데에, 소유라는 관념 자체를 겨누는 오래된 질문 하나가 조용히 서 있는 것이다. 문장은, 애초에, 누구의 것인가.

가중치 속에는 몇 명이 있는가

기계 쪽부터 보자. 세 번째 글에서 썼듯 언어 모델의 실체는 수천억 개의 숫자, 가중치다. 그 숫자들은 수억 명이 쓴 문장들의 통계적 퇴적층이다. 특정 문장이 서랍처럼 보관되어 있는 게 아니라, 무수한 문장들이 지나간 흔적이 눌려서 지층이 됐다.

그래서 가중치 앞에서 소유권 질문은 이상해진다. 이 지층의 어느 켜가 누구의 것인지 가려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 내 문장이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한데, 들어가서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는 아무도 짚을 수 없다. 강물에 부은 물잔의 물을 돌려달라는 요구와 비슷해지는 것이다. 요구가 부당해서가 아니라, 소유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경계선이 이 물건 안에서는 그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낯선 물건을 한참 들여다보다 보면,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이 온다. 문장들이 녹아들어 경계 없는 지층이 된 것. 출처는 잊히고 흔적만 남은 것. 그것으로 새 문장을 짓는 것. 그것은 정확히 내 머릿속의 사정이다.

나의 문장은 어디서 왔는가

나는 이 블로그의 글들을 내 글이라고 부른다. 그 말이 성립하는 범위를 정직하게 재보자.

이 글은 한국어로 쓰였다. 한국어는 내가 만들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수천만 명이 다듬어 물려준 공유재다. 문장의 리듬은 내가 읽은 작가들에게서 왔다. 이 시리즈의 사고 습관, 그러니까 현상을 뒤집어보고 마지막에 나에게 화살을 돌리는 버릇도, 어디선가 읽고 감탄했던 방식들의 퇴적일 것이다. 심지어 가장 나다운 통찰이라 여기는 것들조차, 시간이 지나 원전을 다시 만나고 얼굴이 붉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뉴턴은 자기가 멀리 본 것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선 덕분이라고 썼다. 겸손이 아니라 회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앎도 처음부터 가중치였다. 읽고 듣고 스친 것들이 녹아들어, 출처 태그가 떨어진 채로 지층이 되고, 그 지층에서 새 문장이 올라온다. 우리가 그것을 도둑질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모두가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문화라는 것 자체가 서로의 문장을 소화해 제 살로 만드는 거대한 대사 작용이었다. 인용과 영향과 학습은 그 대사의 다른 이름들이고, 참고문헌이라는 형식은 그 빚을 잊지 않으려는 예법이다.

무소유는 면죄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AI 회사들은 이렇게 말해도 되는가. 보라, 인간도 똑같이 배우지 않느냐. 앎은 원래 공유지가 아니냐.

여기서 무소유라는 말을 정확히 써야 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궁핍의 권유가 아니었다. 불필요하게 갖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가진 것이 실은 맡아둔 것임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연기의 논리로 소유를 해체하는 가르침은 가져도 된다는 결론이 아니라 갚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흐른다. 모든 것을 그물에 빚졌다면, 채권자는 그물 전체다.

이 기준을 대면 비대칭이 드러난다. 인간의 배움은 규모가 작고, 배운 자가 다시 공유지에 문장을 흘려보내는 순환 속에 있었다. 내가 책 백 권을 소화해 글 한 편을 쓰면, 그 글은 다시 누군가의 백 권 중 한 권이 된다. 대사는 쌍방향이었다. 그런데 수억 명의 지층을 흡수한 시스템이 그 수익을 한 곳에 고이게 하고 공유지로는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배움의 확장이 아니라 대사의 차단이다. 여섯 번째 글의 언어로, 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이다. 문제의 핵심은 가져갔다는 사실이 아니라, 돌려보내는 관이 없다는 구조다.

그러니 무소유의 눈은 소송 중인 작가들의 반대편에 서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직관, 무언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는 직관을 더 깊은 층에서 지지한다. 다만 처방의 언어가 달라진다. 내 것을 돌려달라 대신, 그물에서 길어 올렸으면 그물로 흘려보내라. 열린 모델로, 공정한 보상의 관으로, 공유지를 다시 채우는 구조로. 소유권의 언어로는 경계선이 그어지지 않는 곳에서도, 순환의 언어로는 옳고 그름이 선명하게 그어진다.

채무 목록

이 시리즈의 모든 글 끝에는 참고문헌이 붙어 있다. 처음에는 관행으로 붙였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목록의 성격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참고문헌은 장식이 아니라 채무 목록이다. 이 글이 어느 구슬들의 비침으로 지어졌는지에 대한 불완전한 자백. 불완전하다고 쓰는 이유는, 목록에 적을 수 있는 빚은 언제나 자각된 빚뿐이기 때문이다. 진짜 큰 빚은 대개 목록 바깥에 있다. 한국어라는 빚, 문장이라는 빚, 나를 읽는 사람으로 길러준 시간들이라는 빚.

그 빚을 다 갚을 방법은 없다. 원금이 사십억 년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이자를 공유지에 내는 것뿐이다. 길어 올렸으면 흘려보낼 것. 배웠으면 쓸 것. 쓴 것은 다시 누군가 길어 올리게 둘 것.

이 블로그가 무료로 공개되어 있는 것은 그래서 선심이 아니다. 상환이다. 빌린 문장으로 쓴 글이니, 글의 자리는 처음부터 그물이다.


뉴욕타임스의 소송은 2023년 12월에 제기되어 진행 중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1976년에 초판이 나왔다.

참고문헌

  • 법정 (1976). 『무소유』. 범우사. — 소유에 대한 가장 널리 읽힌 한국어 사유. 이 글의 제목이 진 빚.
  • Lessig, L. (2004). Free Culture. Penguin. (한국어판: 『자유문화』) — 문화가 공유지 위에서 자라며, 과도한 울타리가 그 순환을 막는다는 논증.
  • Hyde, L. (1983). The Gift. Vintage. (한국어판: 『선물』) — 예술이 상품 경제가 아니라 선물 경제 속에서 순환한다는 고전.
  • The New York Times Co. v. Microsoft Corp. & OpenAI (2023, S.D.N.Y. 제기). — 학습 데이터와 저작권을 둘러싼 대표 소송.
  • Newton, I. (1675). Letter to Robert Hooke. — 거인들의 어깨라는 표현의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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